칠레 : 간디의 통찰력, 독재에 저항하는 칠레 민중의 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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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미국 CIA와 닉슨 행정부의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정권이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이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리쉴라 하이너는 그녀의 책 <국가폭력의 극악성, 그 말할 수 없는 진실들>(Unspeakable Truths, Confronting State Terror and Atrocity , 2001)에서 독재정권이 낳은 참혹함들을 그려냈다. “독재정권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선동하는 한편 대규모 체포, 고문(고문된 사람들 숫자는 최소 5만명에서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음), 살인 그리고 실종과 같은 자신들의 억압적인 정책들을 정당화하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 독재정부는 수천 명의 반(反)정부 인사들과 입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거나 고문하거나 국외로 추방하였다.

Demonstration of the Sebastian Acevedo Movement.  Photo: Archives of Roberta BacicDemonstration of the Sebastian Acevedo Movement. Photo: Archives of Roberta Bacic이같은 칠레 독재정권의 위협과 공포 속에 사람들 사이에는 불길한 침묵 상태가 이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비폭력의 힘에 대한 간디의 통찰력이 독재와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간디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정립되고 발전해온 비폭력은 불의에 맞써 싸우는 하나의 갈등 해결 수단이자 원리를 의미하며, 더 넓게는 하나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비폭력은 부당한 상황을 결코 그대로 두지 않는 하나의 행동을 의미한다.)

진실을 향한 외침

우리는 사람들이 독재에 맞서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활동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의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다. 독재정권이 휘두르는 직접적인 폭력으로부터의 고통 뿐만 아니라 공포심으로 인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데에서 비롯된 자괴감도 감내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됐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비밀 팜플렛과 리플렛을 찍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협을 감수하고 밤마다 거리의 벽들에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을 고발하는 선전물을 붙이고 다녔다. 이와 같은 행동의 기반에는 적극적인 비폭력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당한 독재정권에 맞서 이를 알려내지 않으면 우리 역시 독재정권과 공범자가 되고 만다는 믿음이었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행동들을 통해서 점차 사람들 사이에 진실을 알려내고 행동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설령 더 큰 위험에 봉착한다 할지라도 비밀리에 행해지는 저항 이상의 행동이 필요했다. 그 동안 수면 아래에서 칠레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행동들을 이제 대중적인 차원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고문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움직임

카톨릭 신부이자 나중에는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The Sebastian Acevedo Movement Against Torture)의 대표를 맡았던 호세 알듀나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를 찾아와 (고문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한 내용과 비폭력의 역동성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고 빈곤(에 저항하는 시위)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그룹이 견지한 원리에도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숙고 끝에 그 당시 벌어지고 있던 칠레 정부의 고문행위를 규탄하는 비폭력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의무가 있었고, 고문에 대한 침묵들을 걷어내어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독재정권이 자리를 잡은지 10년만인 1983년 9월 14일, 고문에 반대하는 운동은 산티아고에 있는 국가조사센터 본부 앞에서의 행동으로 막을 올렸다. 약 7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차도를 가로막고 '고문은 여기서 끝이 났다'라고 쓰여진 배너를 펼쳤다. 그들은 칠레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고 자유를 위한 찬송가를 불렀다. 이 운동 그룹은 1990년까지 매달 최소 한번씩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꾸준히 펼쳤다. 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정부기관들로 하여금 고문 사례들에 대해 조사하고 결정을 내릴 것을 촉구하는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행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당시 대중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긴급조치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 고립감, 두려움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을 마련해 놓을 필요성도 느꼈다. 당시 우리 운동에는 회의 장소나 사무담당자, 인프라와 같은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거리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회원 명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 프락치를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지인들을 통해서만 찾아왔으며 행동 지침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평가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행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당시 대중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긴급조치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 고립감, 두려움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을 마련해 놓을 필요성도 느꼈다. 당시 우리 운동에는 회의 장소나 사무담당자, 인프라와 같은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거리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회원 명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 프락치를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지인들을 통해서만 찾아왔으며 행동 지침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평가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참여자들은 구금이 되거나 기소가 되었을 때 합법/불법적인 제재에 직면하곤 했다. 최루 가스, 구타, 억류 그리고 기소는 시위대에 흔히 자행되던 보복성 조처들이었다. 고문 역시 체포됐을 때 당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취재하려고 하는 방송, 신문 기자들도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몇 번의 행동에서는 참가자가 300명 때로는 50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참가자들은 교인, 비(非)교인을 불문하고 신부에서부터 수도사, 슬럼가 주민, 학생, 장년층, 주부, 인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이데올로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참여자들은 구금이 되거나 기소가 되었을 때 합법/불법적인 제재에 직면하곤 했다. 최루 가스, 구타, 억류 그리고 기소는 시위대에 흔히 자행되던 보복성 조처들이었다. 고문 역시 체포됐을 때 당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취재하려고 하는 방송, 신문 기자들도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몇 번의 행동에서는 참가자가 300명 때로는 50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참가자들은 교인, 비(非)교인을 불문하고 신부에서부터 수도사, 슬럼가 주민, 학생, 장년층, 주부, 인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이데올로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 운동의 주요 목표는 칠레에서 고문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고문에 대한 전(全)국가적인 자각을 일깨울 수 있는 방식을 택했고 이는 칠레에서 고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독재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1988년, 광범위하게 전개된 '위협반대' 캠페인에 이어진 '피노체트 반대 ' 비폭력 캠페인의 결과, 피노체트의 장기집권에 관한 국민투표는 결국 부결되었다. 피노체트 재임 중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여러 진상규명의 노력들과 국가적인 차원의 화해를 위한 시도들이 존재해왔지만, 비폭력 저항은 다른 어떤 수단들보다도 독재를 끝장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Roberta Bacic is a Chilean human rights researcher and activist who now lives in Northern Ireland. She has worked with War Resisters International’s Dealing with the Past Program. A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reviously published in the "100 Years of Gandhian Nonviolent Action" special issue of Peacework Magazine. For more info on Gandhi and Gandhianism, see more WRI links, and selected links to historical Gandhianism from the Peacework issue mentioned above.